일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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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 칸국은 1256년 훌레구가 칭기즈 칸의 손자로서 서아시아 지역에 건국한 몽골 제국의 일파이다. 훌레구는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으며, 시리아를 정복하려 했으나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 왕조에게 패배했다. 이후 킵차크 칸국, 차가타이 칸국 등과 대립했으며, 원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가잔 칸 시기에 이슬람교를 국교로 채택하며 이란-이슬람 문화를 발전시켰다. 14세기 초반 흑사병과 왕위 계승 분쟁으로 쇠퇴하여 여러 왕조로 분열되었고, 1357년 멸망했다. 일 칸국은 예술, 건축,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페르시아 문화를 부흥시켰으며, 복식 부기 등 경제적 발전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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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칸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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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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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이란 땅 |
일반 명칭 | 일 칸국 |
상태 | 몽골 제국의 행정 구역 (1256년~1259년) 독립 칸국 (1260년~1335년) |
존속 기간 | 1256년~1335년 |
별칭 | 훌레구 울루스 (일 칸족/훌레구의 백성/국가) |
언어 | |
공용어 | 페르시아어 (링구아 프랑카, 공식, 행정, 문서) 몽골어 (지배층, 궁정, 문서) |
공용어 외 언어 | 아랍어 튀르크어 |
수도 | |
수도 목록 | 마라게 (1256년~1265년) 타브리즈 (1265년~1306년) 솔타니예 (1306년~1335년)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종교 | |
종교 | 불교 이슬람교 |
지도자 | |
칸 | 훌라구 칸 (1256년~1265년) 아부 사이드 (1316년~1335년) |
역사 | |
주요 사건 | 1256년: 건국 1336년: 훌레구 가문 단절 1353년: 멸망 |
면적 | |
면적 | 3,750,000 제곱킬로미터 (1310년 추정) |
통화 | |
통화 | 디나르 (금화) 디르함 (은화) |
영향 | |
현재 국가 | |
뒤를 이은 국가 | 잘라이르 왕조 초반 왕조 무자파르 왕조 카르트 왕조 사르바다르 인주 왕조 미흐라반 왕조 에레트나 왕조 조지아 왕국 아나톨리아 베이국 맘루크 왕조 (카이로) 수타이 가문 |
2. 명칭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에 따르면, 쿠빌라이 칸은 형제 훌레구에게 또 다른 형제 아리크 부케를 물리친 후 일 칸 칭호를 수여했다. 여기서 '일 칸'은 "부족의 칸, 울루스의 칸"을 의미하며, 이 낮은 칸 칭호는 몽케 칸과 그의 후계자들, 즉 몽골 제국의 대칸에 대한 초기 존경을 나타낸다.[10] 훌레구의 후손들과 이후 페르시아의 다른 보르지긴 왕자들이 사용한 일 칸 칭호는 1260년 이후에야 자료에 나타난다.[10]
오고타이계 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툴루이의 아들 몽케 칸은 동생 훌라구(혹은 훌레구)에게 중동 지역 공격을 권유했다. 1255년 훌라구는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공격하기 위해 떠났고, 1257년 11월 바그다드를 공격, 1258년 마지막 칼리파 알 무스타심을 살해했다.[11]
일 칸국의 '일(イル)'은 원래 튀르크어족에서 서로 동료인 인간 집단을 의미하며, 특히 유목민에게는 유목민이 지배층을 구성하는 유목 국가·유목 정권 그 자체를 이 단어로 표현했다. 이는 몽골어의 울루스와 거의 동의어이지만, 몽골어에도 그대로의 형태로 도입되어 몽골 제국에서는 원래 적대 세력이었던 인간 집단이나 도시, 국가를 몽골 제국 측으로 흡수하고, 또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을 때 "동료가 된다"는 의미로 "일이 된다"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여기에 유목 정권의 군주를 의미하는 칸을 붙인 '''일 칸'''(īl-khān/ايلخانfa) 또는 '''일칸'''은 "부중(部衆)의 군장", "국민의 주"를 의미한다.
칭기스 칸의 손자 훌레구가 이 일 칸의 칭호를 띠었고, 1824년에 프랑스의 동양사학자 아벨 레뮈자가 제4대 군주 아르군이 프랑스 왕국의 필리프 4세에게 동맹을 요청한 서간에서 아르군의 칭호로 일 칸이 사용된 것을 주목하여 일 칸국, 또는 '''일 칸국'''으로 통칭되게 되었다. 《집사》 등 이 정권 자신이나 주변에서 편찬한 기록에서는 페르시아어로 울루스-이 훌라구(Ūlūs-i Hūlākū), 즉 몽골어로 "훌레구의 울루스"를 의미하는 호칭을 번역한 표현이 보이는 등, 몽골 연구자들로부터는 훌레구 일문의 울루스라는 의미로 '''훌레구 울루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3. 역사
훌라구는 시리아 원정을 계속하여, 당시 십자군이 세운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6세가 몽골군에 합류했다. 1260년 훌라구는 이들의 지원을 받아 알레포를 점령하고 시리아의 여러 군소 정권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1260년 봄, 몽케 칸의 사망과 이어진 내분으로 훌라구는 귀환해야 했다.[11]
훌라구는 시리아를 떠나며 키트부카에게 군대를 맡겼다. 키트부카는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아이유브 술탄 안나시르 유수프를 제거하여 시리아를 완전히 장악했다. 키트부카는 이집트 맘루크 왕조에 항복을 권고했으나, 술탄 쿠투즈는 바이바르스와 연합하여 맞섰다. 아인잘루트 전투 (1260)에서 몽골군은 전멸하고 키트부카는 전사했다.[11] 이 전투의 패배로 몽골군은 티그리스 강 이북으로 후퇴했고, 바이바르스는 맘루크 왕조의 권력자가 되었다. 이후 일 칸국과 맘루크 왕조의 국경선은 시리아의 티그리스 강으로 약 80년간 유지되었다.
훌라구의 무슬림 학살은 이슬람교로 개종한 킵차크 한국의 칸 베르케의 분노를 일으켰다. 베르케는 훌라구에게 철수를 요구하며 선전포고했고, 베르케-훌라구 전쟁(Berke-Hulagu War)이 발발했다. 베르케는 승리 후 훌라구 일족과 몽골인들을 학살했고, 이는 몽골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다.[11]
호라즘 제국의 무함마드 2세가 몽골 상인들을 살해하자, 칭기즈 칸은 1219년 아누쉬테긴 왕조에 전쟁을 선포했다. 몽골군은 제국을 유린하며 1219년부터 1221년 사이에 주요 도시와 인구 밀집 지역을 점령했다. 제베와 수부타이 휘하의 몽골 부대는 이란을 황폐화시켰고, 트란스옥시아나는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1]
무함마드 2세의 아들 잘랄 앗딘 밍구르누는 인도로 도망갔다가 1224년경 이란으로 돌아왔다. 그는 몽골의 첫 중앙 페르시아 점령 시도를 격퇴했으나, 1231년 오고타이 칸이 보낸 초르마칸의 군대에 패배했다. 아제르바이잔과 파르스, 케르만의 남부 페르시아 왕조들은 자발적으로 몽골에 항복했다.[12]
서쪽으로, 하마단과 페르시아의 다른 지역은 초르마칸에 의해 확보되었다. 몽골은 1234년 또는 1236년에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를 침공하여 1238년에 그루지야 왕국 정복을 완료했다. 1237년까지 몽골 제국은 페르시아 대부분,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아프가니스탄, 카슈미르를 정복했다.[13] 1243년 쾨세 다으 전투 이후, 바이죠 휘하의 몽골군은 아나톨리아를 점령했고, 룸 술탄국과 트라페준트 제국은 몽골의 봉신이 되었다.[14]
1236년 오고타이는 대 호라산을 재건하고 헤라트를 재건하도록 명령했다. 모술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통치자들은 대칸에게 항복했다. 초르마칸은 트란스카우카시아를 세 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다.[15] 그루지야에서는 인구가 일시적으로 8개의 투멘으로 나뉘었다.[16] 1244년, 구유크 칸은 페르시아 지역의 세금 징수를 중단했다.[17] 몽케 칸은 1251년에 ''오르토그'' 상인[18][19]과 귀족들이 역참과 민간인을 학대하는 것을 금지했다.[20] 그는 새로운 인구 조사를 명령하고 서아시아의 각 남성이 재산에 비례하여 세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페르시아는 아르군 휘하의 4개 구역으로 나뉘었다. 몽케 칸은 카르티드 왕조에게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대한 권한을 부여했다.[21]
훌레구 칸은 톨루이의 셋째 아들이자,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케 칸과 쿠빌라이 칸의 형제였다. 그의 형제 몽케가 1251년에 대칸으로 즉위하자마자, 훌레구는 아바스 칼리파조 정복 임무를 받았다. 그는 이 원정을 위해 몽골 군대의 5분의 1을 받았으며, 많은 중국 학자들과 천문학자들을 데려갔다.[22] 마라게에는 천문대가 세워졌다. 1255년 바이지를 대신하여 훌레구는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시리아까지 몽골의 지배를 확립했다. 그는 1256년과 1258년에 각각 니자리 이스마일파와 아바스 칼리파조를 파괴했다. 1258년에 훌레구는 자신을 일칸(부하 칸)으로 선포했다. 그 후 그는 가자까지 진격하여 1260년 잠시 아이유브 시리아와 알레포를 정복했다. 몽케의 죽음으로 훌레구는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몽골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약 1만 명의 소규모 병력을 남겨두었지만,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패배했다.
훌레구 휘하의 세 조치 왕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골든 호드의 베르케는 1262년에 훌레구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베르케는 바이바르스와 공동 공격을 모색하고 맘루크와 동맹을 맺었다. 골든 호드는 노가이 칸을 일 칸국 침략에 파견했지만, 훌레구는 1262년에 그를 격퇴했다. 일 칸국 군대는 테레크 강을 건너 빈 조치족의 야영지를 점령했지만, 노가이 군대의 기습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1262년, 훌레구는 대 호라산과 마잔다란을 아바카에게, 북부 아제르바이잔을 요슈무트에게 주었다. 훌레구는 남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에서 유목민으로 살았다. 1262년 이후 샴스 알딘 주바이니가 재상으로 임명된 후에야 상황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훌레구는 1265년 2월 여러 날의 연회와 사냥 후에 병에 걸려 사망했다.
3. 1. 훌라구의 서방 원정과 건국
오고타이계 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툴루이의 아들 몽케 칸은 동생 훌라구(혹은 훌레구)에게 중동 지역 공격을 권유했다. 1255년 훌라구는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공격하기 위해 떠났고, 1257년 11월 바그다드를 공격, 1258년 마지막 칼리파 알 무스타심을 살해했다.[11]
훌라구는 시리아 원정을 계속하여, 당시 십자군이 세운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6세가 몽골군에 합류했다. 1260년 훌라구는 이들의 지원을 받아 알레포를 점령하고 시리아의 여러 군소 정권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1260년 봄, 몽케 칸의 사망과 이어진 내분으로 훌라구는 귀환해야 했다.[11]
훌라구는 시리아를 떠나며 키트부카에게 군대를 맡겼다. 키트부카는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아이유브 술탄 안나시르 유수프를 제거하여 시리아를 완전히 장악했다. 키트부카는 이집트 맘루크 왕조에 항복을 권고했으나, 술탄 쿠투즈는 바이바르스와 연합하여 맞섰다. 아인잘루트 전투 (1260)에서 몽골군은 전멸하고 키트부카는 전사했다.[11] 이 전투의 패배로 몽골군은 티그리스 강 이북으로 후퇴했고, 바이바르스는 맘루크 왕조의 권력자가 되었다. 이후 일 칸국과 맘루크 왕조의 국경선은 시리아의 티그리스 강으로 약 80년간 유지되었다.
훌라구의 무슬림 학살은 이슬람교로 개종한 킵차크 한국의 칸 베르케의 분노를 일으켰다. 베르케는 훌라구에게 철수를 요구하며 선전포고했고, 베르케-훌라구 전쟁(Berke-Hulagu War)이 발발했다. 베르케는 승리 후 훌라구 일족과 몽골인들을 학살했고, 이는 몽골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다.[11]
호라즘 제국의 무함마드 2세가 몽골 상인들을 살해하자, 칭기즈 칸은 1219년 아누쉬테긴 왕조에 전쟁을 선포했다. 몽골군은 제국을 유린하며 1219년부터 1221년 사이에 주요 도시와 인구 밀집 지역을 점령했다. 제베와 수부타이 휘하의 몽골 부대는 이란을 황폐화시켰고, 트란스옥시아나는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1]
무함마드 2세의 아들 잘랄 앗딘 밍구르누는 인도로 도망갔다가 1224년경 이란으로 돌아왔다. 그는 몽골의 첫 중앙 페르시아 점령 시도를 격퇴했으나, 1231년 오고타이 칸이 보낸 초르마칸의 군대에 패배했다. 아제르바이잔과 파르스, 케르만의 남부 페르시아 왕조들은 자발적으로 몽골에 항복했다.[12]
|thumb|left|일 칸국의 기병이 적을 추격하는 모습, 라시드 알딘의 ''자미 알 타와리크'', 14세기 초]]
서쪽으로, 하마단과 페르시아의 다른 지역은 초르마칸에 의해 확보되었다. 몽골은 1234년 또는 1236년에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를 침공하여 1238년에 그루지야 왕국 정복을 완료했다. 1237년까지 몽골 제국은 페르시아 대부분,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아프가니스탄, 카슈미르를 정복했다.[13] 1243년 쾨세 다으 전투 이후, 바이죠 휘하의 몽골군은 아나톨리아를 점령했고, 룸 술탄국과 트라페준트 제국은 몽골의 봉신이 되었다.[14]
1236년 오고타이는 대 호라산을 재건하고 헤라트를 재건하도록 명령했다. 모술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통치자들은 대칸에게 항복했다. 초르마칸은 트란스카우카시아를 세 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다.[15] 그루지야에서는 인구가 일시적으로 8개의 투멘으로 나뉘었다.[16] 1244년, 구유크 칸은 페르시아 지역의 세금 징수를 중단했다.[17] 몽케 칸은 1251년에 ''오르토그'' 상인[18][19]과 귀족들이 역참과 민간인을 학대하는 것을 금지했다.[20] 그는 새로운 인구 조사를 명령하고 서아시아의 각 남성이 재산에 비례하여 세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페르시아는 아르군 휘하의 4개 구역으로 나뉘었다. 몽케 칸은 카르티드 왕조에게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대한 권한을 부여했다.[21]
|thumb|훌레구는 일 칸국의 창건자이며, 그의 기독교 신앙을 가진 왕비는 도쿠즈 카툰이다.
|thumb|13세기 몽골의 기마궁수
훌레구 칸은 톨루이의 셋째 아들이자,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케 칸과 쿠빌라이 칸의 형제였다. 그의 형제 몽케가 1251년에 대칸으로 즉위하자마자, 훌레구는 아바스 칼리파조 정복 임무를 받았다. 그는 이 원정을 위해 몽골 군대의 5분의 1을 받았으며, 많은 중국 학자들과 천문학자들을 데려갔다.[22] 마라게에는 천문대가 세워졌다. 1255년 바이지를 대신하여 훌레구는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시리아까지 몽골의 지배를 확립했다. 그는 1256년과 1258년에 각각 니자리 이스마일파와 아바스 칼리파조를 파괴했다. 1258년에 훌레구는 자신을 일칸(부하 칸)으로 선포했다. 그 후 그는 가자까지 진격하여 1260년 잠시 아이유브 시리아와 알레포를 정복했다. 몽케의 죽음으로 훌레구는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몽골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약 1만 명의 소규모 병력을 남겨두었지만,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패배했다.
훌레구 휘하의 세 조치 왕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골든 호드의 베르케는 1262년에 훌레구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베르케는 바이바르스와 공동 공격을 모색하고 맘루크와 동맹을 맺었다. 골든 호드는 노가이 칸을 일 칸국 침략에 파견했지만, 훌레구는 1262년에 그를 격퇴했다. 일 칸국 군대는 테레크 강을 건너 빈 조치족의 야영지를 점령했지만, 노가이 군대의 기습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thumb|은 디르함은 훌레구가 우르미아에서 주조했으며, 'Qa'an al-'Azam(가장 위대한 카간)'이라는 칭호가 새겨져 있다.[23]
1262년, 훌레구는 대 호라산과 마잔다란을 아바카에게, 북부 아제르바이잔을 요슈무트에게 주었다. 훌레구는 남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에서 유목민으로 살았다. 1262년 이후 샴스 알딘 주바이니가 재상으로 임명된 후에야 상황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훌레구는 1265년 2월 여러 날의 연회와 사냥 후에 병에 걸려 사망했다.
3. 2. 초기 발전과 주변국과의 관계
오고타이계 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툴루이의 아들 몽케 칸은 자신의 동생인 훌라구에게 중동 지역 정복을 지시했다. 1255년, 훌라구는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향해 출발했다.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마지막 칼리파 알 무스타심을 살해했다.
훌라구는 시리아로 원정을 이어갔다. 당시 시리아 해안 지역에는 십자군이 세운 기독교 국가들이 존재했다.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6세는 몽골군에 합류했고, 1260년 훌라구는 이들의 지원을 받아 알레포를 점령하고 시리아의 여러 군소 정권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1260년 봄, 몽케 칸의 사망과 그 뒤를 이은 내분으로 훌라구는 군대를 이끌고 귀환해야 했다.
훌라구는 시리아를 떠나면서 자신의 군대를 장군 키트부카에게 맡겼다. 키트부카는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시리아 지역의 아이유브 술탄 안나시르 유수프를 제거하여 시리아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키트부카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항복을 권고했으나, 맘루크 왕조의 술탄 쿠투즈는 바이바르스와 연합하여 이에 맞섰다. 1260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은 맘루크 군에게 대패했고, 키트부카는 전사했다. 이 패배로 몽골군은 티그리스강 이북으로 후퇴했으며, 이후 맘루크 왕조와의 국경선은 시리아의 티그리스 강으로 고정되어 약 80년간 유지되었다.
훌라구의 이슬람 학살에 분노한 킵차크 칸국의 칸 베르케는 훌라구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베르케-훌라구 전쟁(Berke-Hulagu War)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베르케가 승리하였고, 이후 훌라구 일족과 해당 지역의 몽골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은 몽골 제국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아바카는 즉위 직후 베르케의 킵차크 칸국의 침략을 격퇴해야 했다. 1270년에는 차카타이 칸국의 기야스 앗 딘 바라크의 침략을 격퇴했고, 보복으로 부하라를 약탈했다. 1277년, 맘루크 왕조가 아나톨리아를 침략하여 엘비스탄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했다. 1281년, 아바카는 몽케 테무르를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여 파견했지만, 호мс에서 패배했다.
1282년 아바카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아르군과 그의 형제 테쿠데르 사이에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테쿠데르는 일 칸국의 첫 번째 무슬림 통치자였지만, 군대의 지지를 잃었다. 아르군은 비무슬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여 테쿠데르를 전복시키고, 1286년 쿠빌라이 칸에 의해 일 칸으로 확정되었다.
아르군 통치 기간 동안, 그는 무슬림의 영향력에 맞서 싸웠고, 맘루크 왕조와 호라산의 무슬림 몽골 아미르 나우루즈 모두와 싸웠다. 아르군은 1291년에 살해되었다.
1260년 봄, 몽케 칸의 사망 소식을 접한 훌라구는 카라코룸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사이의 몽골 제국 제위 계승 전쟁 소식을 듣고 서아시아에 남아 일 칸국을 건국하기로 결심했다. 훌라구는 시리아에서 철수하면서 군대 일부를 남겨두었지만,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 왕조에게 패배하여 시리아를 상실했고, 이후 맘루크 왕조와 대립하게 되었다.
또한, 킵차크 칸국의 베르케와는 호라즘과 아제르바이잔의 지배권을 두고 대립했고(베르케-훌라구 전쟁, 1262년), 차카타이 칸국과는 마와라안나흐르의 지배권을 두고 대립했다. 그러나 킵차크 칸국과 차카타이 칸국이 오고데이 가문의 카이두를 쿠빌라이에 대항하는 맹주로 추대했기 때문에, 훌라구는 대원 울루스와 깊은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킵차크 칸국의 베르케는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와 우호 관계를 맺고 일 칸국을 협공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훌라구의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와 아들 아바카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일 칸국은 동로마 제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1268년, 바이바르스는 훌라구 사후의 혼란을 틈타 안티오키아 공국을 멸망시켰다. 1269년, 바라크와 카이두가 협정을 맺고 헤라트를 침공했다. 1270년, 제8차 십자군에 대응하기 위해 에드워드 1세가 아크레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7월 21일, 카라스 평원의 전투가 벌어졌다.
3. 3. 잦은 후계자 분쟁과 이슬람화
아바카가 즉위한 직후 베르케의 킵차크 칸국이 침략했지만, 트빌리시에서 베르케가 사망하며 끝났다. 1270년에는 차카타이 칸국의 기야스 앗 딘 바라크의 침략을 격퇴했다. 테쿠데르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부하라를 약탈했다. 1277년 맘루크 왕조가 아나톨리아를 침략하여 엘비스탄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자, 아바카는 무인 앗 딘 페르바네를 처형하고 몽골 왕자 콩코르타이로 교체했다. 1281년, 아바카는 몽케 테무르를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여 보냈지만, 호мс에서 패배했다.
1282년 아바카의 죽음 이후, 그의 아들 아르군과 그의 형제 테쿠데르 사이에 계승 다툼이 발생했다. 테쿠데르는 칭기스 가문에 의해 칸으로 선출되었으며, 일 칸국의 첫 번째 무슬림 통치자였다. 테쿠데르는 몽골 정치 전통을 이슬람 전통으로 대체하려 했으나, 군대의 지지를 잃었다. 아르군은 비무슬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여 테쿠데르를 전복시켰고, 1286년 2월 쿠빌라이 칸에 의해 일 칸으로 확정되었다. 아르군은 무슬림의 영향력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웠고, 맘루크 왕조와 나우루즈 모두와 싸웠다. 그의 재상 부카와 사드 웃 다울라가 지출을 중앙 집중화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두 재상 모두 살해되었고 아르군도 1291년에 살해되었다.
일 칸국은 아르군 형제인 게이하투 통치하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몽골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반면, 몽골 궁정은 불교를 유지했다. 게이하투는 왕국의 재정을 망쳤고, 원나라에서 지폐를 도입하여 국가 재정을 강화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게이하투는 1295년에 축출되었고 그의 사촌 바이두가 그를 대신했으나, 1년도 채 통치하지 못하고 가잔에 의해 축출되었다.
훌라구의 후손들은 80년 동안 페르시아를 통치하면서, 처음에는 샤머니즘, 불교, 기독교 등 여러 종교를 용인했지만, 1295년에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했다.[25] 그러나 일 칸국은 맘루크에 계속 반대했다.[25] 몽골 제국 내의 내전과 북쪽과 동쪽에 위치한 칸국의 적대감으로 인해 서쪽으로의 확장이 어려웠다.[25] 차카타이 칸국은 모굴리스탄에, 킵차크 칸국은 코카서스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일 칸국을 위협했다.[25]
1295년, 가잔은 바이두를 타도하고 제7대 칸으로 즉위했다. 가잔은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이란 국내 몽골 부족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일 칸국은 이슬람화되었다.[25] 가잔은 "이슬람의 제왕(파드샤)"을 칭했고, 이 칭호는 올제이투, 아부 사이드에게도 계승되었다. 가잔은 라시드 앗딘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세제를 개혁하고, 이슬람식 이크타 제를 도입하는 등 이슬람 세계의 재래 제도에 적합한 왕조로 변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몽골 여러 부족의 역사를 기록한 "몽골사"를 편찬하게 하여 몽골 정권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려 했다.
팔레스타인 전선 (1299년–1300년) 및 마르즈 아스 사파 전투에서 맘루크 왕조에 패배했고, 이후 맘루크 왕조에 의한 시리아 지배가 확정되었다.
가잔은 나우루즈의 영향으로 이슬람을 국교로 만들었고,[26]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은 지즈야 (소수 종교세)를 내야 했다.[26] 불교도들에게는 개종 아니면 추방이라는 선택지를 제시하고 사찰을 파괴하도록 명령했지만, 나중에는 완화했다.[26] 나우루즈가 1297년에 살해된 후, 가잔은 종교적 관용을 처벌하고 비무슬림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했다.[27][28]
와디 알-카즈나다르 전투는 몽골이 맘루크 술탄국을 상대로 거둔 유일한 주요 승리였지만, 맘루크가 시리아를 몇 달 동안 지배하는 것을 종식시켰을 뿐이다.
가잔의 정책은 그의 형제 올제이투 통치하에 계속되었는데, 그는 알-알라마 알-힐리와 알-바흐라니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십이 이맘 시아파를 선호했을 수도 있다.[30] 올제이투는 하나피 수니파가 되었지만, 여전히 샤머니즘을 유지했다.[31] 1309-10년에 그는 시아파 무슬림이 되었다.[31] 가잔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일부 불교도들은 올제이투를 불교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32] 몽골인들의 이슬람 개종은 처음에는 피상적인 문제였고, 이슬람의 정착 과정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다.[33] 쿠틀루샤는 샤피이 수니파 간의 분쟁에 인내심을 잃고 이슬람을 버리고 몽골인들이 칭기스칸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33] 무슬림으로서, 몽골인들은 수피즘을 선호했고, 사피 앗딘 아르다빌리와 같은 스승들을 존경했다.[33]
가잔은 "사이드들의 관(다르 앗 시야다)"를 건설했고, 각지에서 모스크와 마드라사, 기타 종교·공공 시설을 건설 및 개수하고, 와크프 물건을 설정했다.
3. 4. 전성기와 문화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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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라구의 후손들은 80년 동안 페르시아를 통치하면서 샤머니즘, 불교, 기독교 등 여러 종교를 용인했고, 1295년에 가잔이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했다.[26] 가잔은 나우루즈의 영향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이슬람을 공식 국교로 만들었다.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은 동등한 지위를 잃고 지즈야 (소수 종교세)를 내야 했다. 가잔은 불교도들에게 개종 아니면 추방이라는 더 강경한 선택지를 제시하고 그들의 사찰을 파괴하도록 명령했지만, 나중에는 이 강경책을 완화했다.[26] 나우루즈가 1297년에 폐위되고 살해된 후, 가잔은 종교적 관용을 처벌하고 비무슬림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했다.[27][28]
대부분 가잔의 정책은 그의 형제 올제이투 통치하에 계속되었는데, 그는 알-알라마 알-힐리와 알-바흐라니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십이 이맘 시아파를 선호할 수도 있다는 제안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30] 유아기에 세례를 받았고 불교와 잠시 교류했던 올제이투는 결국 하나피 수니파가 되었지만, 여전히 일부 잔존하는 샤머니즘을 유지했다. 1309-10년에 그는 시아파 무슬림이 되었다.[31]
몽골인들의 개종은 처음에는 상당히 피상적인 문제였다. 이슬람의 정착 과정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다. 올제이투의 역사가인 카샤니는 쿠틀루샤가 하나피와 샤피이 수니파 간의 분쟁에 인내심을 잃고 이슬람을 버리고 몽골인들이 칭기스칸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고 기록했다. 카샤니는 또한 올제이투가 짧은 기간 동안 되돌아갔다고 말했다. 무슬림으로서, 몽골인들은 수피즘을 뚜렷하게 선호했고, 사피 앗딘 아르다빌리와 같은 스승들을 종종 존경하고 호의적으로 대했다.[33]
가잔이 1304년에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올제이투가 칸으로 즉위하여 형의 정책을 계승했다. 1301년에 카이두가 전사하고 원나라를 종주국으로 하는 몽골 제국의 느슨한 연합이 회복된 결과, 동서 교역이 번성하여 일 칸국의 역사상 가장 번영한 시대를 맞이했다. 올제이투는 새로운 수도 술탄 사데 (솔타니예)를 건설하고, 재상 라시드 앗딘에게 가잔 시대에 편찬하게 했던 '몽골사'를 바탕으로, 몽골을 중심으로 당시 알려져 있던 세계의 모든 지역의 역사를 집대성한 『집사』, 그의 전문 분야였던 의학이나 중국 방면의 약학에 관한 논문, 농서, 이슬람 신학에 관련된 저작집을 집필하게 했다.
가잔과 올제이투 시대에는 용지의 규격화가 추진되었으며, 현재까지 전해지는 대형의 양질의 쿠란과 종교 제학, 의학, 박물학,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사본이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지방사 편찬도 활발했으며, 『집사』 편찬의 영향으로 생각되지만, 특히 삽화가 들어간 『왕서』 등의 문학 작품의 호화로운 사본이 제작되기 시작한 것도 두 칸의 시대부터였다. 이 시대에는 일 칸국에서의 이란-이슬람 문화의 성숙이 나타났다.
일 칸국은 아르군 형제인 게이하투 통치하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몽골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반면, 몽골 궁정은 불교를 유지했다. 게이하투는 추종자들의 지지를 얻어야 했고 그 결과, 왕국의 재정을 망쳤다. 그의 재상 사드르 앗딘 잔자니는 원나라에서 지폐를 도입하여 국가 재정을 강화하려 했으나, 이는 대체로 성공하지 못했다. 게이하투는 또한 소년과의 성관계 혐의로 몽골 원로들을 소외시켰다. 게이하투는 1295년에 축출되었고 그의 사촌 바이두가 그를 대신했다. 바이두는 1년도 채 통치하지 못하고 게이하투의 장교인 가잔에 의해 축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종에도 불구하고, 일 칸국은 몽골 침략자와 십자군을 모두 격파한 맘루크에 계속 반대했다. 일 칸국은 시리아에 여러 차례 침공했지만, 맘루크에 맞서 상당한 영토를 얻고 유지하지 못했고, 결국 시리아 정복 계획과 룸 술탄국 및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해야 했다. 이는 몽골 제국 내의 내전과 북쪽과 동쪽에 위치한 칸국의 적대감에 기인한 바가 컸다. 차카타이 칸국은 모굴리스탄에, 킵차크 칸국은 코카서스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일 칸국을 위협하여 서쪽으로의 확장을 막았다. 훌라구 치세에도 일 칸국은 러시아 대초원에 있는 몽골인들과 코카서스에서 공개적인 전쟁을 벌였다. 한편, 중국에 기반을 둔 원나라는 일 칸국의 동맹국이었고 수십 년 동안 일 칸국을 형식적으로 지배했다(황제는 대칸이기도 했다).[25] 대외 관계 측면에서, 일 칸국의 이슬람 개종은 다른 이슬람 국가에 대한 적대감에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시리아 지배권을 둘러싼 맘루크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와디 알-카즈나다르 전투, 몽골이 맘루크 술탄국을 상대로 거둔 유일한 주요 승리는 맘루크가 시리아를 몇 달 동안 지배하는 것을 종식시켰다.
3. 5. 쇠퇴와 멸망
올제이투의 아들 아부 사이드 바하두르 칸은 1316년에 즉위했으나, 1318년 호라산에서 차가타이 왕조와 카라우나스의 반란, 킵차크 칸국의 침략에 직면했다.[34] 타이치우드 출신 초판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맘루크 왕조와 평화를 맺었으나,[34] 1327년 아부 사이드는 초판을 "거대" 하산으로 교체했다. 1330년대 흑사병이 일 칸국을 휩쓸었고, 아부 사이드와 그의 아들들은 1335년에 흑사병으로 사망했다.[34]
아부 사이드가 사망한 후, 아릭 부케의 후손인 아르파 케운이 즉위했으나, 곧 권력 다툼으로 혼란이 시작되었다. 오이라트 부족의 아리 파디샤는 무사를 옹립했고, 잘라일 부의 하산 부주르그 (대 하산)는 무함마드를 옹립했다. 호라산에서는 조치 카사르의 후예인 토가 테무르가 칸으로 인정받았다. 초반 가문의 셰이크 하산 (소 하산)은 사티 베크를 여왕으로 옹립하고, 대 하산은 토가 테무르를 칸으로 옹립하며 대립했다.
소 하산이 1343년에 암살된 후 혼란은 계속되었고, 1357년 자니 베그가 초반 왕조가 지배하던 타브리즈를 정복하면서 일 칸국의 잔존 세력은 종식되었다. 토가 테무르는 1353년에 살해당했고, 1356년 대 하산이 사망하면서 각지에서 여러 왕조가 자립했다. 1381년 시작된 티무르의 이란 원정으로 이들 왕조는 티무르 왕조에 편입되었다.
4. 역대 칸
아르파 케운은 1335년부터 1336년까지 일 칸국을 통치한 칸으로, 훌레구의 동생 아릭부케의 후손이다. 재상 기야스 앗딘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즉위 반년 만에 오이라트 부족의 알리 파드샤에게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무사는 1336년부터 1337년까지 바그다드의 알리 파드샤에 의해 옹립된 명목상 칸이었다. 그러나 자라이르 왕조의 하산 부즈루그가 무함마드를 옹립하면서 대립하였다. 무사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하산 부즈루그 역시 초반 가문의 셰이크 하산에게 패배하여 무함마드를 잃었다.
무함마드는 1336년부터 1338년까지 자라이르 왕조의 명목상 칸이었다.
사티 벡은 1338년부터 1339년까지 추판 왕조의 명목상 칸이었다. 셰이크 하산이 사티 벡을 여왕으로 옹립하자, 하산 부즈루그는 토가 테무르를 칸으로 옹립하며 대항하였다.
술레이만은 1338년부터 1353년까지 추판 왕조의 명목상 칸이었다. 셰이크 하산은 술레이만을 사티 벡과 결혼시켜 칸으로 옹립하였다. 1341년부터 1343년까지는 사르바다르에게도 칸으로 인정받았다. 1343년 셰이크 하산이 암살된 후, 슐레이만은 사티 벡과 함께 혼란스러운 추판 왕조에 하산 부즈루그의 개입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고, 아슈라프에게 추방당했다.
자한 테무르는 1338년부터 1340년까지 자라이르 왕조의 명목상 칸이었다. 하산 부즈루그는 토가 테무르를 버리고 자한 테무르를 칸으로 옹립하였다.
아누시라완은 1343년부터 1356년까지 추판 왕조의 명목상 칸이었다.
가잔 2세는 1356년부터 1357년까지 칸으로 알려져 있으나, 동전에만 이름이 나타나 있어 실존 여부는 불확실하다.
토가 테무르는 1338년경부터 1353년까지 동 페르시아 지역에서 칸을 자칭했다. 카르트 왕조(1338~1349년), 잘라일 왕조(1338~1339년, 1340~1344년), 사르바다르 왕조(1338~1341년, 1344년, 1353년) 등 주변 제후들에게 칸으로 인정받았다. 하산 부즈루그도 추판 왕조에 대항하기 위해 1344년까지 토가 테무르를 칸으로 인정했다. 1353년 토가 테무르가 살해되면서 이란에서 칭기즈 칸 가문의 군주는 사라졌다.
루크만은 1353년부터 1388년까지 토가 테무르의 아들로서 티무르의 보호를 받았다.
19세기 이란 남부 카슈카이족 유목민들 사이에서 일칸 칭호가 다시 나타났다. 잔 모하마드 칸이 1818/19년에 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모든 카슈카이 지도자들이 이를 이어갔다. 마지막 카슈카이 일칸은 모하마드 모사데크를 지지한 후 1954년에 망명한 나시르 칸이었다. 그는 1979년 이슬람 혁명 동안 돌아왔지만 이전 지위를 되찾지 못했고, 1984년 카슈카이의 마지막 일칸으로 사망했다.
4. 1. 일 칸국 멸망 이후 명목상 칸
아르파 케운은 1335년부터 1336년까지 일 칸국을 통치한 칸으로, 훌레구의 동생 아릭부케의 후손이다. 재상 기야스 앗딘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즉위 반년 만에 오이라트 부족의 알리 파드샤에게 패배하여 살해되었다.무사는 1336년부터 1337년까지 바그다드의 알리 파드샤에 의해 옹립된 명목상 칸이었다. 그러나 자라이르 왕조의 하산 부주르그가 무함마드를 옹립하면서 대립하였다. 무사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하산 부주르그 역시 초반 가문의 셰이크 하산에게 패배하여 무함마드를 잃었다.
무함마드는 1336년부터 1338년까지 자라이르 왕조의 명목상 칸이었다.
사티 벡은 1338년부터 1339년까지 추판 왕조의 명목상 칸이었다. 셰이크 하산이 사티 벡을 여왕으로 옹립하자, 하산 부주르그는 토가 테무르를 칸으로 옹립하며 대항하였다.
슐레이만은 1338년부터 1353년까지 추판 왕조의 명목상 칸이었다. 셰이크 하산은 슐레이만을 사티 벡과 결혼시켜 칸으로 옹립하였다. 1341년부터 1343년까지는 사르바다르에게도 칸으로 인정받았다. 1343년 셰이크 하산이 암살된 후, 슐레이만은 사티 벡과 함께 혼란스러운 추판 왕조에 하산 부주르그의 개입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고, 아슈라프에게 추방당했다.
자한 테무르는 1338년부터 1340년까지 자라이르 왕조의 명목상 칸이었다. 하산 부주르그는 토가 테무르를 버리고 자한 테무르를 칸으로 옹립하였다.
아누시라완은 1343년부터 1356년까지 추판 왕조의 명목상 칸이었다.
가잔 2세는 1356년부터 1357년까지 칸으로 알려져 있으나, 동전에만 이름이 나타나 있어 실존 여부는 불확실하다.
토가 테무르는 1338년경부터 1353년까지 동 페르시아 지역에서 칸을 자칭했다. 카르트 왕조(1338~1349년), 잘라일 왕조(1338~1339년, 1340~1344년), 사르바다르 왕조(1338~1341년, 1344년, 1353년) 등 주변 제후들에게 칸으로 인정받았다. 하산 부주르그도 추판 왕조에 대항하기 위해 1344년까지 토가 테무르를 칸으로 인정했다. 1353년 토가 테무르가 살해되면서 이란에서 칭기즈 칸 가문의 군주는 사라졌다.
루크만은 1353년부터 1388년까지 토가 테무르의 아들로서 티무르의 보호를 받았다.
19세기 이란 남부 카슈카이족 유목민들 사이에서 일칸 칭호가 다시 나타났다.[52] 잔 모하마드 칸이 1818/19년에 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모든 카슈카이 지도자들이 이를 이어갔다.[52] 마지막 카슈카이 일칸은 모하마드 모사데크를 지지한 후 1954년에 망명한 나시르 칸이었다.[52] 그는 1979년 이슬람 혁명 동안 돌아왔지만 이전 지위를 되찾지 못했고, 1984년 카슈카이의 마지막 일칸으로 사망했다.[52]
5. 정치
카탈란 지도 (1375)에 나타난 일 칸국의 지도에는 통치자의 묘사와 함께 일 칸국의 깃발(
중국에 기반을 둔 원나라가 자국민을 고위 관직에 진출시키는 것을 배제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 칸국은 중앙아시아-페르시아("타지크") 행정부와 투르크-몽골 군 장교들과의 협력을 통해 그들의 영토를 통치했다. 페르시아 행정관들 중 일부는 무슬림이거나 셀주크 제국과 호라즘 제국을 섬겼던 전통적인 가문의 일원이 아니었다(예: 주바이니 가문). 1288년부터 1291년까지 일 칸국의 재상은 유대인이었던 사아드 알-다울라였으며, 저명한 재상이자 역사가인 라시드 알 딘 하마다니는 유대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자율성을 높이려는 열망이 있었던 일 칸국의 통치자들은 페르시아 관료들의 전통적인 이란의 왕권 사상을 장려하는 것을 지지했다. 영토 제국에 대한 페르시아의 군주제 개념, 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란의 왕권"(''pādshāhi-ye Irān-zamin'')은 이러한 관료들에 의해 몽골 지배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졌다. 몽골 정복의 지속적인 영향은 일 칸국 시대에 이란에서 "국가"의 출현이었다.
일 칸국 몽골인들은 왕조가 끝날 때까지 유목 생활 방식을 유지했다. 그들의 유목 경로는 중앙 이라크, 북서부 이란,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를 포함했다. 몽골은 조지아,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 술탄, 그리고 쿠파와 루리스탄을 제외하고 이라크, 코카서스, 서부 및 남부 이란을 직접 통치했다. 카라우나스 몽골인들은 대호라산을 자치령으로 통치했으며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다. 헤라트의 지역 카르트 왕조 또한 자치령으로 남았다. 아나톨리아는 일 칸국의 가장 부유한 주로, 수입의 4분의 1을 공급했으며, 이라크와 디야르바키르는 함께 수입의 약 35%를 공급했다.
1330년, 압하지야를 합병하여 조지아 왕국이 재통일되었다. 그러나 조지아로부터 일 칸국이 받는 조공은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1336년에서 1350년 사이에 약 4분의 3으로 감소했다.[36]
5. 1. 몽골 제국의 영향
5. 2. 이슬람 왕조로의 변신
1295년, 아바카의 손자 가잔은 숙부 게이하투를 살해한 바이드를 타도하고 제7대 칸으로 즉위했다. 가잔은 칸위 획득에 앞서 이슬람교로 개종했는데, 이란 국내의 몽골 여러 부족에도 늘어나고 있던 무슬림의 지원을 받아 즉위했기 때문에, 이란에 거주하는 각 부족이 이를 따라 일 칸국은 이슬람화되었다. 가잔은 스스로 "이슬람의 제왕(파드샤)"(Pādshāh-i Islām)을 칭했고, 이 칭호는 올제이투, 아부 사이드에게도 계승되었다. 가잔은 조부 아바카를 섬기던 하마단 출신의 전 유대교도 출신 의사 라시드 앗딘을 재상으로 등용하면서, 세제에 관해서는 종래 몽골의 이란 지배가 시작된 이후 징발이 남발되던 임시 과세를 기본적으로 일시 중단하고, 여러 해마다의 연공을 통상 이란에서 징수일이 고정되어 있던 노루즈 등에 일원화하는 등 징세에 관한 강기를 숙정했다. 이슬람 왕조 전통의 지조(하라지) 세제로 개정하고, 부족의 장군들에게 주던 은급을 국유지의 징세권을 수여하는 이슬람식 이크타 제로 하는 등, 이슬람 세계의 재래 제도에 적합한 왕조로 변신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일 칸국을 부흥시켰다.더욱이 가잔은 정권 중추의 정책 결정에 관여하는 여러 부족과 이를 이끄는 무장들의 몽골 정권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아는 몽골 여러 부족의 역사를 라시드 앗딘에게 구술하여 기록하게 했고, 거기에 궁정 문서고의 고문서와 원로의 증언을 참조하여 "몽골사"를 편찬하게 했다. 이 편찬 사업을 통해 각 부족에게 칭기즈 가문, 더 나아가 훌레구 가문과의 깊은 연관성을 재인식시키려 했던 것이다.
팔레스타인 전선 (1299년–1300년) 및 마르즈 아스 사파 전투에서 맘루크 왕조에 패배했고, 이후 맘루크 왕조에 의한 시리아 지배가 확정되었다.
가잔은 "사이드들의 관(다르 앗 시야다)"라고 불리는 예언자 무함마드와 칼리프 알리의 후예인 사이드들을 위한 숙박 시설을 각지에 건설했고, 또한 각지에서 모스크와 마드라사, 기타 종교·공공 시설의 건설 및 개수, 와크프 물건의 설정이 이루어졌다.
6. 경제
7. 사회
8. 문화
일 칸국이 후원한 예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서적 예술이었다. 사본 제작과 채색의 주요 중심지는 이라크의 모술과 바그다드였다.[41] 이는 맘루크 술탄국의 동시대 작품과 일치하며, 맘루크와 일 칸국 사본 사이에 예술적 유사성이 있으므로 후자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발전 중 하나는 매우 큰 페이지로 된 사본 제작으로, 특히 ''무하카크'' 스타일로 글씨를 크게 썼다. 삽화는 흔했고 역사, 자연, 종교, 천문학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에서 발견된다.[41] 이 중에는 ''샤나메'' 사본의 제작 증가도 있었다. 가장 유명한 사본은 14세기에 아부 사이드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사본인 몽골 대 ''샤나메''이다. 그 페이지에는 중국과 유럽을 포함한 유라시아 전역의 영향을 반영하는 매우 표현적인 삽화가 포함되어 있다.[41]
수십 권의 대규모 꾸란이 남아 있으며, 이 시점까지 제작된 가장 인상적인 예술적으로 제작된 꾸란 중 하나이다. 각각 수년에 걸쳐 제작되었으며, 바그다드에서 제작된 작은 예시 중 하나는 필사하는 데 4년, 장식하는 데 8년이 걸렸으며, 솔타니예 묘소와 같은 일 칸국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기하학적 디자인의 정교한 다색 앞면을 특징으로 한다.[41]
일 칸국 시대에는 고품질의 실크 직물도 생산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예는, 아마도 일 칸국에 확실히 귀속될 수 있는 유일한 예일 텐데,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 (1365년 사망)의 장례복 조각으로, 이란에서 수입한 직물로 만들어졌다. 이 직물은 원래 일 칸국 국영 공방, 아마도 타브리즈에서 제조되었으며, 1319년 이후 아부 사이드의 이름과 칭호를 담고 있다. 이는 램퍼스와 복합 직조로 황갈색과 빨간색으로 짜여졌으며, 금색 씨실이 사용되었다. 넓은 교대 밴드 모티프가 특징이다. 줄무늬의 한 세트는 능형 패턴과 그 사이에 식물 모티프와 공작새가 있는 화려한 메달리온으로 채워져 있으며, 다른 줄무늬는 아랍어 문자로 된 대형 서체 비문으로 채워져 있다. 그 사이에는 다른 동물로 채워진 더 좁은 밴드가 있다.[43] 유럽에서 왕실 장례 수의로 이 작품을 사용한 것은 이 시기에 이란 직물이 해외에서도 여전히 매우 높이 평가되었음을 시사한다.
금속 세공에서 일 칸국 작품은 이전 이란 작품보다 더 크고 장식도 풍부한 경우가 많았다. 주요 생산 중심지로는 타브리즈와 시라즈가 있었다. 현존하는 작품은 구리 상감세공된 황동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이전 시대에도 알려진 유형이며, 보다 값비싼 궁정 물건에 사용된 새로운 트렌드인 금으로 상감된 황동도 있다. 이러한 예 중에는 이슬람 시대 이란에서 가장 큰 보존된 촛대의 받침대가 있는데, 1308~09년에 올제이투의 재상 중 한 명이 의뢰했으며 높이는 83cm이다.[44] 금과 은으로 된 물건도 중요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예시는 남아 있지 않다.
도자기 생산은 품질이 좋았지만 이전 세기의 도자기만큼 정교하고 다양하지는 않았다.[41] 일 칸국 이란에 가장 일반적으로 귀속되는 유형은 소위 "술탄아바드" 도자기이다. 이들은 녹색 또는 회색-갈색의 슬립이 있는 더 부드러운 흰색 페이스트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유형의 그릇은 일반적으로 잎 배경에 동물 그림으로 하회장식되었다. 카샨은 13세기 말까지 루스터웨어 생산의 중요한 중심지였지만, 1284년 이후 도자기 생산을 중단하고 1340년까지 타일만 생산했다. 디자인은 이전 시대보다 덜 완성되었지만 연꽃과 시무르그와 같은 새로운 중국에서 영감을 받은 모티프를 통합하기 시작했다. 1270년대 또는 1280년대부터는 페르시아어로 청금석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된 ''라즈바르디나''로 알려진 새로운 스타일의 고가 도자기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종종 짙은 파란색 또는 때로는 푸르스름한 터키석 유약을 가지고 있었고, 빨간색, 검은색, 흰색, 금색으로 상회장식되었다. 이들은 탁트-이 술라이만에서 발견되었으며 몽골 이전 시대의 ''미나이'' 도자기를 대체했을 수 있다.
8. 1. 문학과 역사
일 칸국 시대에는 역사에 관한 수많은 저술이 창작되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일 칸국 행정관을 위해, 또는 특정 통치자를 위해 쓰였다. 초기 시대의 많은 작가들은 몽골 이전 왕조에서 훈련받았지만 새로운 정권 하에서 후원을 받았다.[40]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라시드 알딘의 ''자미 알 타와리흐(Jami' al-tawarikh)''('역사 총서')로, 처음에는 가잔이 의뢰했지만 1307년에 완성되어 올제이투에게 헌정되었다.
일 칸국의 후기에는 11세기 시인 페르도우시의 이란 서사시인 ''샤나메''에 대한 관심도 두드러졌다. 이 작품의 새로운 사본이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함달라 무스타우피의 작품과 같이 그 스타일과 형식을 모방한 새로운 역사적 저작물을 낳는 영감이 되기도 했다.[40]
8. 2. 종교
9. 몽골 제국의 해체와 유산
일 칸국의 등장은 서아시아에 중요한 역사적 영향을 미쳤다. 통일된 몽골 제국의 설립은 아시아 전역의 무역과 상업을 크게 완화시켰다. 일 칸국과 중국에 본부를 둔 원나라 사이의 통신은 이러한 발전을 장려했다.[47][48] 중국 황제의 용 의복은 일 칸국에서 사용되었으며, 중국 정치 시스템에 대한 몽골의 큰 영향으로 인해 일 칸국은 중국 황제 칭호를 사용했다. 일 칸국은 원나라로부터 받은 중국 정부 기구에 대한 언급이 포함된 인장 외에도 중국 문자가 새겨진 인장을 직접 만들었다.[49]
[[File:Ilkhante ship sailing the Indian Ocean towards India, in the Catalan Atlas (1375).jpg|thumb|일 칸국 깃발([[File:Flag_of_the_Ilkhanate.svg|20px]]) 아래 배가 인도양을 항해하여 델리 술탄국([[File:null|20px)의 지배하에 있는 인도의 해안으로 향하는 모습, 카탈로니아 지도 (1375).[46]]]
일 칸국은 또한 이후의 사파비 왕조 국가와 궁극적으로 현대 이란의 길을 닦는 데 기여했다. 훌레구의 정복은 또한 이란을 동쪽으로부터의 중국의 영향에 노출시켰다. 이는 그의 후계자들의 후원과 결합하여 이란의 독특한 건축적 우수성을 발전시켰다. 일 칸국 치하에서 이란 역사가들은 또한 아랍어로 글을 쓰는 것에서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로 글을 쓰는 것으로 전환했다.[50]
복식 부기의 기초가 일 칸국에서 시행되었으며, 메르디반은 이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채택되었다.[51] 이 회계 시스템은 주로 1295년부터 1304년까지 가잔 칸의 농업 및 재정 개혁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 경제적 필요의 결과로 채택되었다.
10.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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